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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논어를 읽다

by keykiho 2024.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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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논어》에 열광하는가?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읽는 《논어》는 살아갈 날들을 위한 방향과 길을 보여준다!
이 책은 《논어》에서도 지금 우리에게 가장 공감되고 이해하기 쉬운 49가지 공자의 말을 선별하여 담았다. 정신이 번쩍 드는 날카로운 쓴소리부터 마음을 다독이는 위로, 그리고 실질적인 실천 방법까 지 공자의 말씀에 다양한 사례를 버무려 소개한다.

철학과 교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고전과 인문을 읽고 공부해 온 저자는 평범한 직장인 의 시선에서 본 《논어》를 ‘태도’, ‘배움’, ‘관계’, ‘성찰’, ‘실천’ 편으로 풀어내 우리 눈높이에 맞는 생활밀착형 논어를 보여준다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논어를 읽다

 

제 1장 태도 _ 길은 내 안에 있다

남들의 시선이 아닌 마음의 좌표를 읽어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의 학자는 자신을 위해 공부하고 연구했는데, 지금의 학자는 남에게 자랑 하기 위해서 한다.”

 

子曰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자왈 고지학자위기, 금지학자위인

 

외부에 맞춰진 시선을 내면으로 돌려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마음껏 과시하기 좋도록 시스템이 만들어져 있다. 특히 SNS가 그렇다. 최신 인테리어로 꾸며진 집, 멋진 차, 명품 가방과 옷들…. 잘 설정된 사진들이 즐비하게 넘쳐난다. 디지털 공간에 올라오는 사진들을 보면 나만 빼고 모두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 모습과 달리 과장되어 연출된 모습인 것을 알면서도 많은 이들이 상대적 상실 감에 빠지곤 한다.

 

이처럼 남들에게 보이는 것에 집착하면 어떤 문제들이 생길까? 우선 마음이 불편하고 불행해진다. 나 의 실상과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예쁘게 포장하려다 보니 실제와 보여지는 것 사이에 괴리가 생겨난 다. 혹은 해결되지 못한 열등감을 남들의 인정과 부러움으로 보상받고자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외부에서 주어진 환호나 부러움이 나의 열등감을 없애주지는 못한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내가 해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일상을 SNS에 올리고 사람들의 관심과 호응에 집착하고 있다면, SNS와 인터넷을 잠시 멈추길 권한다. 처음에는 금단현상이 나타나 조금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시기가 지나고 나 면 외부로 향했던 시선이 조금씩 자신에게로 전환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남들의 시선이나 반응에만 쏟았던 에너지가 점차 나에게로 옮겨온다. 그렇게 되면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내 가 좋아서 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공자는 “군자는 세상을 떠나고 나서 자신의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는 것을 근심한다.”(<위령공>15.19) 고 말했다. 군자도 사람이기에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자리하고 있음이 드러난 문구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만 그것이 지나쳐 ‘명예욕’에 집착하면 문제가 된다.

 

자신이 뜻한 길을 가다보면 많은 장애물이 나온다. 그중에서 제일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명예욕이 다. 애초 뜻했던 바를 외면한 채 명예욕에 집착하면 본질이 훼손된다. 자신이 무엇을 원했는지 왜 그 일을 하려고 했는지 잊게 된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어디 로 가야 할지, 삶의 방향이 보일 것이다.

 

내가 싫은 일은 남에게도 강요하지 말라

자공이 “하나의 말로써 평생 실행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라고 여쭙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것 은 서(恕)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바를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

 

子貢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

자공문왈 유일언이가이종신행지자호

 

子曰 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

자왈 기서호 기소불욕, 물시어인

 

서(恕)는 ‘용서하다’라는 의미의 한자다. 용서란 무엇인가? 지은 죄나 잘못한 일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덮어주는 것을 말한다. 즉 남의 처지를 이해하고 동정하는 공감의 마음에서 나오는 감정이다. 《논어》에서 서의 개념은 중요하다. 상대방의 처지를 나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으로 이는 인과 예 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서를 풀어쓰면 ‘같을 여’(如)와 ‘마음 심’(心)이다. 남과 나의 마음이 같다는 의 미다. 측은지심보다 더 근본적인 개념이다.

 

공자는 안연이 세상을 떠나고 나자 증자를 자신의 학통을 전수받을 수제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어느 날 증자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의 도는 하나의 근본 이치로 처음부 터 끝까지 꿰뚫고 있다.”(<이인>4.15) 이것이 그 유명한 ‘일이관지’의 경지다. 공자가 나가자 제자들 이 우르르 증자에게 몰려가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스승님의 도는 충과 서일 뿐이구나.” 증자는 다른 제자들에게 공자의 가르침을 들려주었다. 충과 서 는 인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방법으로, 진심을 다하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결국 이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예다. 평소 인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위해서 공자가 늘 강조했던 개념이다.

 

내가 하기 싫다면 다른 사람도 하기 싫다

자공이 공자에게 ‘딱 한 가지’ 실천해야 할 것을 질문했을 때, 공자는 서라고 대답했다. <공야 장>(5.11)을 보면, 공자는 자공에게 “너는 ‘기소불욕 물시어인’(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바를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의 경지에 이르기 힘들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공에게 평생 가져가야 할 가르침 으로 ‘서’의 화두를 던졌다. 그만큼 제자가 평생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고 실천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강요하는 일은 흔하다. 가정에서도 집안일을 한 사 람에게만 전담시키거나, 주말에 여유가 생겨도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귀찮고 힘든 일 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안 하고 싶은 것이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상사로부터 듣기 싫은 말을 아랫사람에게 똑같이 하거나 하기 싫은 일 을 동료나 후배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시키는 이들이 있다. 유독 쓰기 싫은 보고서나 분석을 다른 사 람에게 맡기는 경우는 흔하다. 혹여 시간이 없어서 부탁하는 경우나 후배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 목적 이라 하더라도 같이 참여해서 함께 고민해야 한다. 나만 편한 일을 하고 입으로만 지시를 한다면 그 조직의 사기는 떨어지고 선후배 관계는 종속적 관계로 고착화된다.

 

리더가 될수록 ‘기소불욕 물시어인’의 정신은 중요한 자질이다. 한 사람이 힘든 일을 도맡아서 하면 다른 사람들은 편하지만, 그 사람의 업무 능률은 떨어지고 회사 생활도 불행하게 된다. 그걸 뻔히 알 면서도 모르는 척한다면 리더로서의 자질이 없는 것이다.

 

집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부모는 TV 앞을 떠나지 않으면서 아이들에게만 공부하라고 말하는 것은 무책 임하다. 아이들이 공부하도록 만들려면 부모가 솔선수범해서 공부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나는 하 기 싫지만 아이는 당연히 해야 한다는 마음부터 버릴 필요가 있다.

 

 

제 2장, 배움 _ 파도를 읽으려면 바다를 알아야 한다

마음을 열면 세상은 온통 스승의 바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덕망이 높은 사람을 만나면 같아지기를 생각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만나면 마음속으로 그와 같지 않은지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

 

子曰 “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

자왈 견현사제언 견불현이내자성야

 

인간관계의 운은 내가 만든다

우리가 살면서 본받을 만한 사람을 많이 만나면 좋겠지만 생각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을 만나는 일이 많다. 특히 어린 시절 우리의 인간관계는 제한적이고 수동적인 편이다. 집과 학교, 학원 등 한정된 곳 을 쳇바퀴 돌 듯이 오가며 주어진 인간관계에 놓이기 때문이다. 가족은 선택의 여지없이 주어지는 관계이고, 학교나 학원에서 맺는 관계도 상당히 제한적이다.

 

그러다 보니 학창 시절 지식 외에 삶의 여러 측면에서 가르침을 주는 학교 선생님은 우리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된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키팅 선생은 학생들의 창의력과 예술성을 존중하며 그것을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도왔다.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과 같은 눈 높이에서 보조를 맞추며 걸어 나가고자 했다. 만약 실제 삶에서 키팅 선생 같은 사람을 만나다면 그 야말로 복 받은 인생일 것이다.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있다. 재주가 뛰어나고 열심히 노력해도 일의 70퍼센트는 운이 좌우한다는 의 미다. 그런데 운이 작용한다고 해서 무조건 운명론적으로 받아들일 일은 아니다. 운이라는 것은 외부 적으로 주어지는 측면도 있지만,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70퍼센트의 운이 주어져도 30퍼센트의 노력이 없다면 그 운은 제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운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업무를 게을리했거나 주변 평판이 좋지 않으면 운 좋게 찾아온 기회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줘야 할 수도 있다.

 

뜬금없이 운칠기삼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어린 시절에는 제한적인 틀 안에서 인간관계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좋은 선생님이나 학우를 만나면 운이 좋은 것이지만 아닌 경우도 있다. 그 또한 나의 운명인 것이다. 그러니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음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물론 주어진 관계 안에서 노력을 해야 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직장생활을 하거나 사업을 하는 등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이 시작되면 달라진다. 직업이나 회사를 선택하는 것은 나의 결정이고, 어떤 사업을 하는지도 내가 결정한다. 어떤 사람을 만나서 관계를 맺느냐 하는 것도 순전히 나의 안목에 따른 선택으로 결정된다. 내가 주도적으로 관계 를 선택하고 유지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좋은 사람을 잘 선별해서 만나는 것도 어찌 보면 능력이 다.

 

나쁜 사람에게서도 배울 점이 있다

공자는 주변에서 늘 배울 거리를 찾았다. 나쁜 사람이나 옹졸한 사람을 만나도 그를 반면교사 삼아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랬기에 다방면의 재주를 갖고 학문의 깊이를 더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자공은 위나라 대부 공손조로부터 “공자의 학문은 어디서부터 온 것이오?”라는 질문을 받았 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희 스승께서는 세상 모든 것에서 배우셨으니, 어찌 일정하게 정해놓은 스승이 있겠습니까?”(<자장>19.22)

 

공자에게는 모두가 스승이었다.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나이 든 사람도, 어린 사람도…. 마음을 열고 배울 자세로 덤벼드니 세상 만물이 그에겐 스승이었다.

 

 

제 3장, 관계 _ 우리는 사람을 통해 넓어지고 깊어진다

맞지 않는 사람과 억지로 함께하지 말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충과 신을 중시하라. 자기보다 (덕행이) 못한 사람과 교류하지 말라. 과오가 있으면 고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子曰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자왈 주충신 무우불여기자 과즉물탄개

 

공자가 충실하고 신의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 것은 그동안의 가르침과 흐름을 같이 한다. 나의 잘못이 있으면 고쳐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무우불여기자(無友不如己者)’를 직역하면 “나보다 못 한 사람과는 교류하지 말라.”인데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여기서 주의할 점은 나보다 못하다는 의미는 교육 수준이나 생활 수준이 떨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덕 행이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봐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앞 문장에 “충과 신을 중시하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에게 성실하고 진실하고 충실하고 신의를 지켜야 하는데 나보다 못한 사람은 이 를 지키지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각자의 길을 가는 것도 좋은 관계의 해법이다

공자는 상대방을 포용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들 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 다. 선한 사람을 따라 본받고, 선하지 못한 사람을 보고 고친다.”(<술이>7.21)라고 했다. 다시 말해 주변 사람들 중 선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서도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배워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배운다는 것과 길을 계속 같이 간다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좋은 상사와 고약한 상사를 만났다고 하자. 좋은 상사에게는 당연히 배울 것이 많다. 무엇보다 긍정적인 측면을 배울 것이다. 반면 안 좋은 상사에게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우며 그를 반면교사로 삼게 된다. 그런데 회사를 떠난 뒤라면 어떨까? 나쁜 상사와 계속 연락을 할 것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나의 인간관계에서는 삭제되어야 할 존재다.

 

회사뿐만 아니라 친구, 동료, 선후배 관계도 모두 마찬가지다. 사회생활을 위해서 나의 선택과 상관없 이 엮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선택할 수 있는 관계라면 문제가 있는 사람과 굳이 같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런 사람은 나에게 계속 부정적인 에너지만 주기 때문이다.

 

조금 냉정하게 들릴 수 있지만 가치관이 다른 사람과는 힘들게 같이 갈 필요가 없다. 나와 다른 물에 서 노는 사람을 함께 섞으려 하면 부작용이 생긴다.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 떻게든 설득해서 나와 방향을 맞춰 나아가기를 원할 테지만 쉽지 않다. 사람은 웬만해서는 바뀌지 않 는다. 그러니 맞지 않는 사람과 억지로 함께하려고 애쓰지 말자. 그러면 서로가 피곤해지고 에너지만 낭비하게 된다.

 

만약 나는 책을 좋아해 친구들과 독서 모임을 하고 싶은데 친구들은 골프 모임과 그 후의 술자리를 훨씬 더 좋아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을 설득해서 책을 읽게 하는 것도 좋지만, 그게 잘 되지 않는다면 애써 강요하지 않는 게 좋다. 그 친구들과는 다른 것을 공유하면 되고 독서 모임은 책을 좋 아하는 다른 이들과 하면 된다.

 

그런데 친구끼리 공유할 수 있는 게 점점 없어진다면 그때는 문제가 된다. 나는 책에 더 깊이 빠지 고, 친구들은 스포츠나 정치, 연예인, 주식 등의 주제에만 관심이 있다면? 나는 운동을 좋아하는 반 면 친구들은 술자리를 더 좋아한다면? 하나부터 열까지 맞는 것이 없고 공유할 것이 없어진다면 갭이 생기고 점차 벌어지게 된다. 아마 친구들과의 관계도 전과 같지 않음을 느낄 것이다.

 

반면 공유할 것이 많아 코드가 더 잘 맞는 사람을 만난다면 어떨까? 책을 읽으면서 나의 의식이 성장 할 때 같이 성장하는 사람들을 만난다면 공감대는 더욱 커질 것이다. 내가 생각한 부분, 내가 밑줄 그으며 공감한 부분을 상대방도 같이 공감했다면 너무 반가운 기분이 들 게 분명하다. 그러면 자연스 레 그와 친구가 된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관계를 가리켜 함께 불법을 닦으며 수행하는 벗이라는 의미 로 ‘도반(道伴)’이라 부른다. 뜻을 같이 하는 친구라는 의미다.

 

굳이 불교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함께’ 추구하는 ‘가치’를 목표로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정말 큰 행운이다. 도반의 관계는 남녀노소 제약이 없다. 할아버지와 청년이 도반이 되기도 한다. 나이가 들었 다고 무조건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기에 그들은 나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자신의 가치를 찾고 공부 하며 깨달음을 얻는다.

 

친구는 꼭 나와 동갑일 필요는 없다. 나보다 어리거나 나이가 많아도 얼마든지 친구가 될 수 있다. ‘인생 친구’는 나이를 뛰어넘어 깨달음을 공유하고 정신적으로 연대하며 함께 성장하는 관계다. 나이, 지역, 직업 등의 경계를 넘는다면 내 삶의 스코프는 훨씬 넓어진다.

 

그러나 이때도 중요한 것은 역시 나 자신이다. 내가 나만의 가치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핵심이다. 내가 현실을 부정하거나 불평하면서 미래에 대한 막연한 걱정, 과거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 있다면 내 옆에는 그런 사람들만 남게 될 것이다. 좋은 이들이 내 곁에 머물 리 없다. 그러니 내가 먼저 올 바른 가치관을 갖고 자기중심을 세워야 한다.

 

 

제 4장, 성찰 _ 멈춰서 돌아보라

덕을 베푸는 자가 진정한 승자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덕이 있는 자는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子曰 “德不孤, 必有隣”

자왈 덕불고 필유린

 

덕은 모든 것을 이긴다

공자가 당시 위정자들에게 덕치를 강조하며 “덕으로써 정치를 하는 것은 북극성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어도, 다른 별들이 북극성을 둘러싸고 돌고 있는 것과 같다.”(<위정>2.1)라고 말했다.

 

북극성이 제자리에 가만히 있어도 모든 별들이 주위를 맴도는 것처럼 군주가 덕으로 다스리면 힘으로 압력을 가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감화를 받아 저절로 따른다는 의미다. 즉 덕이 가장 빛날 뿐만 아니 라 중심이라는 의미다. 덕치를 실천하는 군주는 결코 외롭지 않다. 절로 따르는 신하와 백성이 있기 때문이다.

 

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예다. 마음속으로만 덕을 갖고 있으면 상대방이 알 수 없으므로 표현해야 한다. 덕이 없는 예는 겉치레에 불과하다.

 

위정자도 마찬가지다. ‘덕으로 백성을 다스린다면 법을 어길 때는, 백성이 부끄러움을 안다’(<위 정>2.3)고 했다. 반면 엄격한 법으로만 다스리면 백성은 형벌을 면할 방법만 궁리한다. 왕을 두려워 하고 피하려고 하고, 서로를 의심한다. 그렇게 되면 왕은 홀로 남은 북극성처럼 외로워진다.

 

안타깝게도 당시 위정자들은 공자의 이러한 덕치주의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치에 인품은 그 다지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보다는 강력한 병사, 뛰어난 병법가, 풍족한 식량이 우선이라고 봤다. 그러한 패권주의를 통해서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범하고 병합하는 역사는 반복되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남은 것은 무엇인가? 백성들의 아픔과 고통뿐이었고 영원할 것 같던 제국도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빛나는 북극성도 떨어졌다.

 

공자는 제나라의 경공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제나라 경공은 말 4,000필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그가 죽던 날 백성들 중 누구도 그의 덕을 칭송하지 않았다.”

(<계씨>16.12)

 

경공은 재상 안영 덕분에 나름대로 치세를 펼쳤으나 사치와 향락을 즐겼던 인물이었다. 대단한 부와 권세를 쥐었지만 덕을 갖추지 못했던 경공의 죽음을 애도하는 백성은 없었다. 반면에 ‘두 임금을 섬 길 수는 없다’며 충절을 지킨 백이와 숙제는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다 굶어 죽었지만 사람들은 후세 까지 그들을 칭송하고 기렸다. 이렇듯 덕은 부와 권세가 가닿을 수 없는 최상의 경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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